Small Cute Blue Gray Pointer Russell's teapot
불효자 역설이론

 

 

# 도예과 그 새끼랑 토공과 그 신입



갓 성인의 문턱을 딛고 선 20세의 청춘은 이렇게 또 개쳐망한다.

네, 여기 한참 늦게 반항을 시작한 성인이 바로 나에요. 근데, 그게 꼭 저의 잘못이라곤 말하기 애매하거든요.

 

 

 

 

 

 

 

 

 

 

 


Bastard paradox

 

 

 

 


 

사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보는 관점이 더 유리하다. 벨은 그걸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냉철하게 보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야, 그래도 비교적 변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니까.

 

벨은 그 칸 안에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실체가 있는 책과 인형, 편지, 머리핀, 목도리. 실체가 없는 시의 구절과 인형들의 이름, 스스로의 기억과 자장가.

 

변하지 않으면서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것들은 대개 큰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도 확정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둘 이상의 타인 사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그러니까 우정, 신뢰, 존경, 사랑 같은 것들은 과연 얼마나 오래 간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증인 두고 쓰인 계약서보단 불확실하겠지. 하나도 아니고 둘이 말이야.

 

마음이 맞아봤자 얼마나 가겠어.

 

 

그래서, 청춘은 불효의 이름으로 개쳐망한다.

 


 

 

 

 

 

 

 

 

 

 

 

벨은 결국 내리막길을 내리달렸다.

 

"야!"

 

억울해서 혼자만 망할 수는 없는 일이지.

망할 거면 너도, 나도.

 

 

"가지 마, 테르시아!!"

 

 

 

 

 

 

 

 

 

 

 

 

 

 

 

 

 

 

 

 

'성인은 이런 거구나.'

'그런가?'

 

정작 벨의 전공 책 위로 한탄을 끄적인 제이슨은 한참 전에 관심을 끊은 문장이었다. 벨은 제이슨이 '그럼 그렇지'하는 질린 표정으로 다시 제 공부를 시작하고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성인이라서 달라진 걸까?

 

전공 책 속의 자그만 글씨는 그마저도 빽빽이 붙어서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사진 하나 없다. 분명, 이 학과에 진학한 것은 싱가포르의 Henderson waves를 눈앞에서 직관한 추억 덕분이었는데, 정작 배우는 것들은 대입 시절에도 본 적 없는 광활한 숫자들이다.

 

하중을 계산할 수 있어야 건축물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아마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만큼 확실히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벨에겐 그것보다 더 낯선 것들이 있다.

성인이라서 이런 걸까, 아니면 벨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엄밀히 따지면 벨에게 낯선 것은 이 숫자들이 아니라 거대한 작품들이다. 분명 다리를 보고 뛰었던 가슴은 숫자 앞에서 죽은 듯이 잠잠해진다.

 

그야,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도 공부는 계속해서 해왔던 것이지만. 처음 마주친 압도는 생애 유일했기 때문이다. 유-일. Only one.

 

그래서 벨에게 성인은 책임보다도 해방의 메리트가 더 크다. 모든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의 자유를 얻어낸 시기. 그러기 위해 스스로 족쇄를 찼지만.

 

 

그러나 이곳의 대부분은 벨보다는 제이슨과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벨처럼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벨은 제법 본인의 삶에 만족하나, 그렇다고 그 삶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본인도 어느 정도 깨달았다.

 

3을 받던 아이가 6을 기대하고 5에 실망한대도, 1을 받던 아이는 2에 행복을 얻는 법이니까.

 

벨은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 말하는 모범생들처럼 펜을 든다.

 

 

시험 기간의 도서관은 침체된 양동이 같다.

 

그렇게 케이튼 교수를 욕하면서도 그녀의 물리학에 영혼을 쏟는 제이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투덜거려도 결국은 대부분 타협한다.

 

벨도 크게 다르진 않다.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분야지만, 그렇다고 감정까지 연기해 보일 순 없는 탓이다.

 

 

사실 벨은 자신이 거대한 산물을 마주칠 때 얼마나 빛나는 지 알고 있다. 을 가득 담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하늘에 맞서는. 바짝 치켜뜬 눈꺼풀을, 일렁이는 홍채를 따라 펄럭이며. 두근.

 

 

벨은 그렇게 심장을 쿵쾅댄다.

 

잔잔히 가라앉는 현재의 맥박수와는 차원이 다르지.

무언가 날 확 끌어당기는 거. 날 매혹하고 사로잡는 그런 거.

 

과도한 자극은 모두 나쁘다 말하지만,

결국엔 정말 판단의 눈을 가려버릴지도 모르지만,

 

벨은 어쩔 수 없게도 그런 쪽에 약하다. 평생을 혈육의 바람대로 살아왔으니, 매번 겪는 평범이 지루해질 때도 됐다.

그러니까 딱 이것만 욕심내는 거야.

 

태생이 순한 건지, 딱 여기까지만 다짐했다.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듣고.

 

아무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너무 오랫동안 참아서 그런 거지.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다리를 보러 가야겠다. 어디든 좋다. 기세 좋게 들고 온 100cm 짜리 자를 가져가서 종이를 깔고 설계도를 그려야지.

 

그렇게 이 도서관을 벗어나는 생각 꼬리를 잇다가도,

 

 

"베아트리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션은 볼을 긁적이며 자신의 빈 커피 컵을 가리켰다.

 

"뭐 사다 줄까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젓는다. 션은 어정쩡한 미소로 이어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다시 현실직시.

 

성인이란 뭘까.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아직도 하나 없고, 처음으로 허락받은 일탈은 이런 숫자들로 변모하고, 그 와중에 결혼은 어색하지 않은 시기.

 

천천히 내려간 시선이 네 번째 손가락에 닿으면 심플한 반지가 반짝인다.

 

그러니까, 올해 말이었던가.

 

 

똑똑.

 

또다시 상념으로 빠져들기 무섭게 끌어올려졌다.

 

 

벨의 손 앞에 그림자가 진다.

그리고 그 위로, 커피 한잔이 놓인다.

 

반지를 낀 제 손과는 달리 새하얀 손의 약지엔 아무것도 끼워져있지 않았다.

 

 

벨은 의아함에 고개를 들고, 결국 눈이 마주친다.

 

 

 

콰다당!

 

 

둔탁한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벌떡 일어선 벨에게로 주위의 시선이 모두 모인다. 아니, 한 사람의 시선만 빼고.

커피를 밀어준 남자는 태연히 벨의 전공 책을 훑었다. 그리고는 한 부분을 짚으며 고개를 든다.

 

 

'어떤 건데?'

 

입 모양으로만 묻곤 웃어 보이는 모습이, 아 정말 거지 같게도 생생했다.

 

 

그러니까 벨은 순식간에 숙취를 느끼는 것이다.

 

일주일 전에. 그러니까, 나.

 

네?

 

나 뭐한 거지?

 

 

예?

 

 

 

 

 

 

 

 

 

 

 

 

 

 

 

 

 

 

 

 

 

그럼 조금만 돌아가 보자.

 

그러니까, 딱 벨이 까맣게 잊은 그날. 취해서 개가 됐던 그날 말이다.

 


 

 

 

 

주는 대로 받아서 그대로 위를 향해 퍼부은 알코올은 사납게 본인 주장을 시작한다. 여느 20살이 그렇듯이 본인 주량 모르고 주는 대로 어정쩡하게 받아마시다 훅 갔다는 말이다.

 

오롯이 벨만의 잘못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이미 20살 동기 셋은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있지 않은가.

어이구, 엉엉 울기까지 한다.

 

어떻게 알았냐고?

 

벨도 거기 대기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지. 못된 헬라. 들어가서 30분을 저러고 있다. 다른 사람은 땅바닥에 토하라는 건가. 세칸 다 찬 화장실에는 구역질 소리가 삼중주였다.

 

처음엔 분명 기를 쓰고 정신력으로 버텼고, 중간에는 구역질 소리에 위기까지 겪었으면서도, 그 짓이 30분쯤 되니 서서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시야는 어지럽지만, 벨은 한참을 화장실 바닥 타일을 노려보다가 일어선다. 오히려 여기 있다간 다시 사이클 돌아갈 것 같아.

 

그렇다고 해도 아직도 달리는 중인 술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닌 터라, 살금살금 주점의 뒷문을 열었다. 아침에 비가 왔던 걸 티 내듯 축축한 비 냄새가 난다. 시원하기도 하고.

 

괘씸하게도, 본인은 본인이 얼마나 취한 지 모르기에. 기어코 앞날도 생각 못 한 채, 휘청이는 걸음을 끌고 골목길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골목엔 이미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문제일 게 있나. 혼자 쓰는 골목도 아닌데.

 

사실, 문제는 본인에게 있었다. 위장 경련이 좀 덜해진 거지, 알코올이 해독된 건 아니라 판단력이 지구 내핵까지 떨어졌다. 벨은 그 하찮은 판단력으로 뜨거워진 눈을 비비다가도 벌떡 일어섰다.

 

티딕이는 쇳소리. 라이터를 켜는 손이 참, 어둠 속에서도 하얗고 예뻤다. 불쑥 의문이 들었다.

 

자신감은 지용성이라 술에 둥둥 뜨는 반면에 이성은 수용성이라 그대로 녹는다. 구린 가성비다. 이성 없는 자신감은 모터 달고 하늘로 솟구친다. 지가 어디로 올라가는 지도 모른 채 손만 흔든다.

 

베아트리스! 난 잘 있어! 넌 잘 있니?

물론! 당연하지!

 

누가 보면 환장할 정신상태로 손을 뻗었다. 조금은 거칠게 붙잡은 소매의 주인이,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벨을 내려다 봤다.

 

하얗고 빨갛고, 분홍분홍한 게 참. 예쁘기도 하지.

 



"나도,"

 

문득 든 생각인데, 공교롭게도 술도 마셔봤고, 19금 공포 영화도 관람해봤고, 조별 과제도 해본 주제에.

 

 

"펴보고 싶어요."

 

아직 담배를 못 펴봤다니?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 알코올 냄새가 지독했다. 으, 숨을 후후 불어 머리를 멀찍이 떨어뜨리다가도 다시 붙었다.

 

"나도 주세요."

 

 

ㅋㅋ
그래, 성인이라면 술 먹고 개진상 짓도 해봐야 하는 거지.

 

 

쓸데없이 발음이 멀쩡했다. 차분하게 말을 마치고 꾹 입을 닫은 채 올려다본다. 벨은 무심코 깜빡이는 눈에 붙은 속눈썹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하나 세어보다가는 숫자를 까먹어서 다시 도돌이표.

 

담배주인은 웃는 것도 참 섬세한 공예품처럼 웃었다. 눈꺼풀의 위아래가 가까이 몸을 붙이고 선명한 노랑을 감춘다.

 

 

아직 채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던 빨간 입술이 열렸다.

 

"싫은데."

 

 

참 이상한 일이지.

자제한다고 생각해왔던 충동이 한순간에 몰려와 덮친다는 건.

 

멍때리는 것도 잠시. 거세게 밀쳐낸(본인이 잡았으면서) 벨이 울렁이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는다.

 

 

 

 

 

 

어, 잠시만.

나 토까지 했어?

 

 


 

 

 

 

 

"충격의 회상은 다 했어?"

 

반쯤 정신이 나간 벨을 무턱대고 끌고 나와선(근데 도서관에서 계속 그러고 있으면 애초에 쫓겨나긴 했을 것이다), 360° 오픈된 학교 내 벤치에 앉혀놓고(근데 폐쇄적인 공간이 더 문제긴 했다) 커피와 같이 사 온 건지 딸기 라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여유롭다(근데 여유롭지 못할 게 뭐야, 애초에 잘못은 내가 했지, 응).

 

대답이 없으면 남자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다시 빨대를 문다.

오히려 저렇게 나와서 더 무섭다고 하면 기만인가.

 

 

한숨을 쉬고 싶을 때면, 꼭 언니 생각이 났다. 한숨을 쉬면 복이 날아간다더니. 안 쉬어도 복은 날아가는 것 같아, 언니. 복은 기화성이 높아.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애초에 말술 먹는 언니는 취하지도 않았겠지. 어째서 난….

 

 

아무튼. 땅굴 파기는 이 정도까지만 하고.

 

벨은 눈을 꿈뻑이며, 수중에 있는 지폐의 수를 셌다. 세탁비가 얼마나 하지. 드라마에서나 봤지, 한 번도 직접 이용해 본 적 없는 터라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닌가. 돈보다 저 인간이 벨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가 더 문제인 걸까? 같은 학과라기엔 본 적 없지만, 혹시 복학한 선배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와, 최악.

 

아니지, 이게 먼저가 아니지. 일단 잘못은 벨이 먼저 했으니까.

 

어째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곤란해지기만 했다. 정말 옳게 살고자 노력했고, 제법 그렇게 살아온 터라 어떻게 사과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벨이 이렇게 전적으로 피해를 준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본인이 생각하기엔 없었단 말이다.

 

"저기,"

 

그래도 베아트리스가 어디 가겠어?

 

묵묵히 결국은 해내 보이는 벨이니까. 고민은 길지만, 실행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처음 해보는 거면 처음 해보면 되는 문제였다.

 

살짝 찡그린 눈썹으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날은 취해서 경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잊은 기억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는 것도 방금 기억나서…. 실례했습니다."

 

침묵.

 

벨은 이 분위기가 빙하 아래 심해까지 냉각되기 전에 조금 빠르게 덧붙였다. 역시 이래서 두괄식 두괄식 하는 거구나. 중요한 건 가장 먼저 말을 해야,

 

"세탁비는 어느 정도로 드려야…!"

 

되는 건 줄 알았는데.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네?"

 

퍼뜩 고개를 치켜든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가볍게 치운 남자가, 그 위로 살짝 다가왔다. 건조한 눈빛이 찬찬히 무언가를 살핀다.

 

술 한 모금 입에 대지도 않은 벨은 금세 울렁거림을 느꼈다.

 

밝은 색의 홍채. 스물 세가닥까지 세는 데 성공했던 속눈썹. 적당히 서늘한 손가락. 그 속에 풍기는 흙냄새.

울렁울렁. 미묘하고도 낯선 감각이 하나둘.

 

벨은 기어코 바짝 뒤로 붙으며 질끈 눈을 감는다.

 

뭔가 이상했다. 저게 계산된 플러팅이라도 이런 생뚱맞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어째서,

벨은 왜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뭐가 겁이 나는 거야?

 

 

"아닌데."

 

왜 자꾸 뭐라도 들킨 사람처럼.

 

 

균형 잡혀 눌리던 벤치가 삐걱 거리며 소리를 냈다. 남자는 요상한 모습으로 굳은 벨을 보고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그대로 가버리는가 싶더니 친절하게 신상을 밝힌다.

 

"진짜 하고 싶은 말 생기면 찾아와. 도예과 정도면 여기서 제법 가까우니까?"

 

그 와중에 이름은 왜 안 알려주는 건데.

 

 

 

 

벨은 단정한 발걸음 소리에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숨이 골라졌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어서, 그 상태로 멍하니 거기서 죽쳤다.

 

 

진짜 나도,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게 뭐죠?

 

뭐긴 뭐야.

여러분은 지금까지 안정을 퍼다 부은 벨의 메리트가 갈라지는 걸 보셨습니다.

 

쩌저적!

 

 

 

 

 

 

 

 

 

 

 

 

 

 

 

 

 

 

"아니, 아아 사 온다며. 장난해?"

"아닌데? 화장실 갔다 온 건데?"

"응, 샤샤. 구라도 정도껏 쳐. 넌 손에 일회용 컵 들고 화장실 가?"

 

양궁계 샛별, 가비타느는 눈을 치켜뜨고 손가락질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체대까지도 소문이 퍼질 정도로 개판인 현대미술학 교수가 펑크를 제대로 내줬다길래 아아 한 잔 좀 사 와달라고 내쫓았더니, 지 것만 사 올 줄은 추호도 몰랐다.

 

눈 한 번 예쁘게 뜨고 방긋방긋 웃는다. 문제는 상대가 가비타느, 아니 가비였다는 거고.

 

"그래, 내가 왜 체대 다니는 지 알려줄 때도 됐지."

"우와, 멋있네."

 

되려 주위 학생들만 질린 얼굴을 했다.

둘은 꽤 유명 인사다. 굳이 따지면 셋인데, 일단은.

 

가비는 말했다시피 양궁계에 마하 130,000km/h 속도로 내다 꽂힌 샛별이었다.

 

열아홉이란 어린 나이로 조기입학을 한 귀염둥이는 1년 만에 어엿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승격🌟했답니다.

 

아쉽게도 올림픽 시즌에 휴학을 겸한 터라, 아직도 1학년이지만 그게 중요한가. 이미 그녀의 인생엔 꽃길이 펼쳐졌는데.

 

당연히 학교 내에서도 가비는 양궁 여신이다. 새하얀 머리칼이 보이면 누구든지 돌아봤다. 헐, 저거 가비타느 아니야?

 

그럼 가비는 당당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거 아니고 사람인데요.

 

 

샤샤는 도예 국가대표,

일리는 없고. 1학년 1학기 때는 그 얼굴로 유명했다.

 

야, 대박. 도예과 핑머 존잘.

 

에타 게시글 하나로 예대, 체대 계열의 학생들(다른 과 학생들은 대부분 예대, 체대의 언덕을 두려워했다 졸라 높거든)이 굳이 굳이 도예과 건물을 서성이게 만든 주범이 아니던가.

 

도예과 핑머 누구랑 사귈 거 같냐? 난 현대무용 과탑
ㄴㄴ 피아노 누님이랑 사귐 각
ㄴㄴ 나랑 사귐 ><

 

ㄴㄴ 군대 감.

 

1학년 2학기, 샤샤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굳이 굳이 20살 꽃다운 청춘에 입대한 샤샤는 정확히 18개월 뒤 복학했다.

바로, 경영 백설 공주가 입학한 년도였지.

 

경영 백설 공주에 대해서 할 말은 또 3페이지가 넘는데, 아주아주 간략히 줄이자면 아파서 2년 꿇은 병약예민남이자, 양궁 여신 남친이다. 굳이 몇 년 꿇은 걸 쓰는 이유는 샤샤와 동갑임을 어필하기 위한 거고.

 

 

아무튼.

 

1학년 2학기, 이 셋은 웬 교양 하나를 같이 듣게 된다.

이름하여, 『책으로 세상 읽기』.

 

조별 과제는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감상 제출. 감상은 문서로도, 영상으로도, 그림으로도 받았다. 셋이 제출한 건 연극이었다.

 

 

"가비, 커피 마시지 않을래요?"

"어? 스노우! 금방 왔네."

 

가비는 물고 있던 샤샤의 손가락을 퉤 뱉고 일어선다. 체육복을 탁탁 털고, 달려가는 것이다.

하, 눈꼴시려.

 

"보고 싶었어, 스노우!"

 

유명해지지 않고는 배길 조합이었다. 얼굴로도, 그 성격으로도. 그냥 백설 공주 연극으로도.

 

 

샤샤는 투닥임에 의해 여기저기 뻗친 머리로 몸을 일으켰다.

 

받지 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에 대해 조잘거리는 가비를 한 번, 주위의 질린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지 꿀 떨어지는 눈으로 가비를 내려다 보는 스노우를 한 번.

 

너무 노골적이어서, 티가 안 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잠시 심드렁했던 표정이 금세 웃음기를 걸쳤다.

 

"나도 안아줘, 스노우."

 

"꺼지세요."

 

뭐, 아직 모를 수도 있지.

 

 

 

 

 

 

 

 

 

 

 

 

 

 

 

 

 

 

아니, 누가 오라면 오는 줄 알아?

네, 잘 도착했습니다. ㅋ

 

 

꿀 같은 공강 화요일.

 

기어코 등교한 벨은 지옥의 예체동산을 오르게 된다. 왜 거진 모든 대학의 예체대는 산 위에 있을까. 애초에 체력이 필요한 체대생과 살기 위해 체력 좀 늘려야 하는 예대생에 대한 배려?

 

뭐, 하루 정도는 오히려 꽤 재밌는 정도지만 이게 일상이 된다면 조금 곤란할 것 같기는 하다. 쉬는 시간 10분 만에 건물 사이를 오가야한다면 더더욱.

 

보고 반한 게 다리라, 정말 감사.

 

 

벨은 무턱대고 건물 앞에 섰다.

이름도 하나 모른다. 그냥 도예과라는 거 하나 아는데, 그런데도 왔다.

 

그것도 션 차 타고.

 

 

션은 좋은 사람이었다. 엄청 친절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좋은 사람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붙어 다니면서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를 사람. 사실, 자신 없지만.

 

약혼 첫날, 벨은 션을 보며 안도했다. 벨이 션을 보는 표정이나 션이 벨을 표정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둘은 묘하게 닮았다.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결코 서로에 대한 관심 없는 표정. 서로에게 제법 친절하게 굴려고 노력하나 정작 애정이 담기지는 않는다.

 

그냥저냥….

 

 

기이한 약혼의 사연은 뻔하다.

 

벨의 할아버지께선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아니어도, 땅따먹기 게임을 현실판으로 끌고 나올 수 있는 부자긴 했다.

그 예로 소유지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 토지엔 호텔이 올라가는 중이다. 클리셰답게 5성급으로.

 

골프치고, 친목도모하고, 지분 싸움하고, 뒤통수 치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살았다. 돈과 명예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나.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손녀가 태어난다고 마음가짐이 달라질 리가 있나.

할아버지는 고르고 골라 벨의 신랑감을 점찍었다.

 

벨보다 딱 두 살 많은 남자로.

무난한 것 같은 성격에 무난한 외향, 무난한... 암튼 그런 무난 속에서 유일한 유난이 영국의 백작 가문 핏줄인 그런 남자.

 

 

벨의 할아버지는 두어번 저울질했다.

 

물론 작위가 사업에 직접적으로 도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업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십중팔구 간섭 질이 심하다. 같은 일한다고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직 노망나지도 않았고 날 생각도 없는데 모두 먹여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아니지, 먹여주는 척 뒤에서 빼가려고 안달이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앉아있는데.

 

그래서 무난한 놈을 골랐다. 무난하고, 이래라저래라 안 하고, 뒤통수 칠만한 뒷배도 없는 놈으로. 21세기에 생뚱맞게 아직도 백작가를 내세우는 걸 보면, 적어도 명예를 떨굴 집안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지.

 

 

물론 당연하게도 벨의 의사는 들어가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신, 뒤늦게 제안이 들어왔다.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준다면, 원하는 대학을 가도 좋다.'

 

애초에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하다. 모르지 않았다. 물론 꽤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으나, 적어도 지금은 안다.

하지만 벨은 동의했다.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꿈은 참 비싸게도 팔려 일생을 소모시켰다.

그래도, 꿈이 있다는 게 그런 거였다.

 

 

그래서 왠지 손이 차다.

 

꼭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울렁거려. 이놈의 심인성 숙취는 낄 때, 안 낄 때도 모르고 난리 친다.

 

그러니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에 대해선 쉽사리 답이 안 나온다는 거다. 분명 그 약혼을 어길 생각으로 온 건 아니디. 그날 있었던 일을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고 말하기엔 이미 눈치가 자란 어른이었지만. 그래도 정말로. 그냥 나는…

 

 

그냥 나는,

 

 

 

 

벨은 굳이 왜 공강에, 굳이 왜 학교 뒷산을 오르는가?

아아, 그냥?

 

 

"그냥?"

 

"네?"

 

벨은 화들짝 물러섰다. 그 반사적인 행동에 옆을 지나치던 사람이 홱 고개를 돌린다.

 

"네?"
"네?"

 

새하얀 머리가 흩날렸다. 옆의 남자와 대화 중이었는지, 생뚱맞은 방향에서 들려온 대답에 눈을 크게 뜬 채였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새빨간 눈동자.

 

벨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가,"

"벨!"

 

와락 뛰어든 온기가 벨을 감쌌다.

 

"가비!"

 

 

진도가 갑자기 빠르게 나갔다면, 친절히 설명해줘야지.

 

우리의 벨과 양궁 여신은 공교롭게도, 이사 후 연락이 끊긴 중학교 동창 되시겠다.

 

 

 

 

그렇다면, 지금 멀쩡히 데이트를 즐기던 경영 백설 공주의 마음은?

: 졸라 심기 불편.

 

 

 

 

 

 

 

 

 

 

 

 

 

 

 

 

 

 

 

데이트를 날린 백설 공주, 스노우는 스콘을 잘라 가비의 접시에 덜어주며 머리를 굴린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다 좋다. 좋은데, 굳이 잘 겹치지도 않는 가비와 스노우의 공강 시간에 이래야 할 이유는 없다. 가비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찾아 카페까지 찾아왔는데, 굳이 굳이 학교 앞 카페에서 스콘이나 썰어라?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본론.

 

 

"들어보면 공대생이신 것 같은데 이쪽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묻고 싶은데요."

 

정작 예체대건물에선 공대보다 경영학과 건물이 더 먼데도.

 

질문에 조잘대는 소리가 뚝 끊긴다. 가비는 반짝이는 눈으로 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게? 혹시 내가 이 학교 다닌다는 거 알고 온 거야?"

 

그럼 벨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굳는다.

 

 

아니? 몰랐는데? 난 가비가 양궁을 직업으로 하는 지도 몰랐어.

 

라고 대답? 말이 돼냐?

 

 

어물쩍 우물거리는 벨의 모습에 스노우는 단정히 나이프를 정리하며, 스피드를 높였다.

 

"예대 앞에 서 계셨던 것 같은데. 가비를 찾아왔으면 좀 더 들어오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응? 예대? 예대에 아는 사람 있어?"

 

 

벨은 눈치가 꽤 좋은 편이다. 무감하지 않고, 다정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다른 사람의 감정을 민감히 마주할 줄 안다.

그래서 커다래진 눈으로 스노우를 돌아봤다.

 

지금 저 사람, 나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닌데….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맞아요."

 

동시에 친절한 벨이라, 빤히 마주 보다가 그냥 대답해준다. 문제는 동시에 고지식한 벨이라는 점이다.

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쫓아내고 싶을 수도 있지. 정말 가비를 좋아하나 봐. 하나하나 질투하는 걸 보면, 응? 하나하나 질투?'

 

 

'사소한 부분에까지 이어지는 질투의 동의어는 집착?'

이라고 생각한다고.

 

고지식하기도 한 벨이 먼저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표정을 고수하던 스노우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유명 커플에 시선이 모였던 카페 내에도 요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방금까지 후와후와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저 둘이 기싸움하지?

 

가비는 그것도 모르고 스콘 냠냠 씹으며, 밝게 소리 낸다.

 

"진짜? 우리가 찾아주면 되겠다. 그치, 스노우?"

 

 

보는 사람 제일 김빠지게 하는 건 역시 저 한마디로 분위기가 종결된다는 거지.

 

살짝 매서워졌던 눈매가 쳐지는 것도 금방~

경영 백설 공주와 우리의 벨은 순순히 눈을 깔았다.

 

🌸그 의견 정말 싫지만, 일단 너는 좋아🌸

 

 

벨은 당연히 고마운 일이었고,

스노우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비가 그러고 싶다는 데, 말릴 수는 없지. 냅킨으로 가비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으면, 벨 쪽에서 순순히 힌트를 읊었다.

 

 

"도예과라고 하셨고, 일단 머리 색이 분홍색인데요."

 

가끔은 풀지 않아도 답이 나오는 문제가 있는 법이다.

 

"샤샤?"

 

 

 

 

 

 

 

 

 

 

 

 

 

 

 

 

 

 

텅 빈 작업실에 혼자 앉아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가?

 

음, 일단 늦었다는 거지. 다 끝내고 손절한 작업실에 왜 기어들어 오겠어.

 

 

샤샤는 아주 제대로 늦었다. 사실 늦은 건 아닌데, 과제물 제출이 늦은 건 맞다.

 

놀랍게도 샤샤는 대인배다.

샤샤랑 대인배. 정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걸.

 

하지만 사실이었다. 정말 대인배는 아니고, 그냥 본인 기준 괜찮은 건 괜찮았다. 그 기준이 일반인이랑 달라서 뭐, 대인배다 소인배다 나누기엔 부적절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대인배라 부르는 게 맞다.

 

동기가 술 처먹고 완성작 깨뜨렸다.

 

그날이 그날이다.

벨이 #*$%한 날.

 

 

샤샤는 정말 미안하다며, 심지어 쳐 울면서 석고대죄하는 마모 씨를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사실 석고대죄를 하든 말든, 처맞아도 할 말 없는 극악무도한 짓이긴 했지만. 샤샤 기준! 괜찮았으니까.

 

도예가 좋아서 하는 거지, 점수가 좋아서 하는 건 아니었고. 막말로 어디 취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불공평하게 집에 돈도 좀 있어서, 공방을 차려도 지가 차렸다. 애초에 차리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졸업하면, 여행을 가지 않을까?

 

 

아무튼 샤샤는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쳐 울어 재끼는 동기가 사주는 고기 맛있게 먹고, 질질 짜면서 숙취해소제 사 오겠다길래 보내고, 녀석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담뱃갑 챙겨 들었다.

 

담배는 군대 가서 배우는 거라지. 샤샤는 딱히 거절하지 않는다. 선임이 한 대 들려주면 폈다. 안 들려주면 안 폈다. 금단증상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으나,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피면 피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평소라면 달라했을 때 줬을 거야.

 

벨은 알까? 샤샤가 왜 싫다고 했는지.

 

그 도색 빛 눈으로, 어떻게 봤는 지.

 

 

느긋이 물레 돌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고개를 든다.

아마 한참은 모를 게 분명했다. 본인이 어떤 눈으로 샤샤를 보는 지, 따위는.

 

마주친 홍채가 열기를 가지고 크기를 키웠다.

 

 

"왜,"

 

샤샤는 싱긋 웃으며 마주하는 것이다.

 

"이름은 안 알려줬어요?"

 

저 사랑의 쟁취자를.

 

 

 

 

 

 

 

 

 

 

 

 

 

 

 

 

 

"물 안 묻히면 끊,"

"……."

"기는데. 그렇게."

 

벨은 버벅대며 두동강 난 흙을 내려다 봤다. 아니, 별로 세게 누르지도 않았는데 이게 이렇게 뚝 떨어진다. 열심히 빚은 꽃병의 꼴이 (사실 처음부터 그닥 좋다 말하긴 어려운 생김새였지만) 영락없는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벨은 입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본다.

 

그러니까 제가 안 한다고 했잖아요.ㅠㅠ

 

눈치 보는 벨은 차마 그렇게는 말 못하고 슬쩍 손을 움직였다. 그래도 흙인데, 다시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끊기면 구울 때 거의 다 금 가서 다시 해야 돼."

 

응, 어림도 없지.

 

샤샤는 앞에 앉아 느긋하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이미 기한이 지난 과제인데도, 제출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벨은 그것도 모르고 체험 중이었다. 웃기긴 하지. 애초에 엄청 미묘한 표정으로 문 열고 들어왔으면서, 아니 지금 자네 뭐 하는 건가?

 

 

맥락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쭈뼛쭈뼛 들어온 벨은 샤샤가 앉히는 대로 앉았고, 알려주는 대로 흙을 만졌다. 정말 도예 체험하라고 부른 것도, 직접 찾아온 것도 아닐 텐데 둘은 잘만 시간 버렸다.

 

 

샤샤는 아무렇지 않게 흙을 가져다 치우고, 새 것을 올렸다. 이번엔 본인도 물을 묻힌다. 그대로 벨의 손을 잡으려다 정지.

이미 여기저기 얼룩덜룩해진 벨의 손에서 약지를 쥐었다.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럽다.

 

 

벨에게만

 

 

손가락의 끝까지 밀려 올라가는 반지에 무턱대고 손을 뒤로 당겼다.

 

"싫어요!"

 

알고 있다. 애초에 물레질을 반지 끼고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다 망가트릴 속셈도 아니고. 아는데.

 

 

오히려 알아서. 벨이 왜 자꾸 이상해지는 지. 벨도 그걸 알아서.

 

찡그린 얼굴로, 뒤로 콰당!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팠다. 아파서 눈을 내리 깐다.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 반지는 빼면 안됐다. 그게 맞는 거고, 그게. 그게 최선이니까.

 

 

샤샤는 천천히, 다시 제자리에 앉아서 고요히 물레를 돌린다. 잡아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독이 될 것 같았다. 대신 말했다.

 

"후회할 거면, 안 와도 돼."

 

 

달그락 거리며 물레가 돌아간다. 물에 젖은 축축한 흙냄새가 가득 찬다.

 

벨은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터덜터덜 일어서 뒷문을 열었다. 복도에선 볕 냄새가 났다.

 

 

울컥.

드르륵-

 

 

 

 

 

 

 

 

 

 

 

 

 

 

 

 

 

가끔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주인공들은 보면, 의문이 들기는 한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벨은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 이웃들. 물론 상호작용의 감정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유동적인 그래프를 보이지만, 그래도 꾸준히 사랑하고 있다. 베풀고 보듬고 위로받고 격려하고.

 

근데 이 정도로는 결혼식장을 박차고 뛰쳐나갈 수 없다.

 

20년 동안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니는 이럴 때일 수록 반항해야 하는 거라고 속삭였지만, 벨은 미적지근하게 웃고 말았다.

 

아무리 사랑해도, 어떻게 모든 걸 버리고 뛰쳐나갈 수 있어.

 

그건 현실적이지 못해.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테르시아가 시발 과팅을 쳐나갔다.

 

벨의 감정을 표현한 것일 뿐,
당사자는 욕설을 사용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뭐, 질투 작전? 그런 거? 는 아님.

 

샤샤는 딱히…. 그렇게 밀당 해대는 쪽은 아니었다. 당길 거면 당기고, 밀 거면 민다. 그것도 상대방 의사에 반하지 않게. 적어도 최소한의 윤리 관념은 지켜서.

 

그래서 과팅은 그냥 연례행사였다. 샤샤는 누가 부르면 제법 잘 가주니까. 그게 과팅이든, 술자리든. 정말 아무런 의도 없는. 사실 이 소식을 들으면, 벨이 혼란스러워 할 수는 있겠다 생각했지만. 이 소식을 누구한테 듣겠어? 계열도 다른 과 신입생이.

 

문제는 샤샤는 아직 모르는 공동 지인 있다는 거에서부터 발생한다.

 

 

"뭐요? 과팅이요?"

"예?"

 

스노우는 마치 털인형을 동족으로 착각해 구애의 춤을 추는 오랑우탄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몸을 내뺐다. 말만 안 했을 뿐이지, 과도한 소음에 대한 기분 나쁨을 여실히 드러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실 눈치 보기 Off 된 벨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가비는 저어기서 핫도그 세 개 사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개같이 버려지겠지만) 여긴 무슨 뜨거운 개… 암튼 그런 분위기로 달아오른다.

 

 

벨은 언제나 품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쟤는 잘사는 집 딸이구나 알만하게, 말투도 좀 딱딱했고, 자세는 항상 발랐고, 성격은 뭐 그냥 품격 그 자체.

 

그리고 그 입에서 '뭐요?'가 나온 순간, 또 그 놈 때문에 벨 인생 최초가 생기고 만다.

최초로 토하고, 최초로 구성지게 말하고, 최초로… 응, 그랬다가.

 

최초로 눈에 보일 정도로 화가 났다.

 

 

'벨은 화 안 내. 화를 낸다기 보단, 틀린 게 있으면 고치려 노력을 하지. 분노라는 감정은 있을 텐데, 그걸 표출하지는 않아. 엄청 엄청 착하거든. 저러다 병나는 거 아닐까? 차라리 시원하게 터뜨렸으면 좋겠어.'

 

가비, 원하는 걸 이루신 것 같은데요.

 

스노우는 결국 그 분노에 인증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 오늘 못 나오겠다고 한 겁니다."

 

아니 타이밍도 거지 같지? 샤샤는 진짜 선약이 있어서, 새 친구 소개해준다는 가비의 말에 거절한 건데. 이러니까 완전 대놓고 노려서 과팅 간 게 됐잖아?

 

 

벨은 결국 그날 자기 노려보는 스노우도 무시한 채 2차는 파스타 집으로, 3차는 카페로, 4차는 고깃집 가서 술마저 두 병 깠다.

 

친히 가비가 태워준 택시에서 내리면, 쓸데없이 바람이 선선하다.

 

화가 났다. 본인도 이런 본인이 어이가 없지만, 나는 건 나는 거였다.

 

그다음엔 슬펐다. 정말 슬플 것도 많다. 고작 이런 일에.

 

고작? 고오작? 아무리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었어도. 아직 1주일도 안 지났는데 과팅을? 그렇게 다시 화나고.

 

그렇게 다시 울적하고.
다시 화나고.
결국 억울하고.

 

 

분명 집으로 가라 한 가비의 말은 고기와 함께 소화시킨 뒤, 학교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 또 언덕을 오른다. 무슨 전설의 고향 구미호 마냥, 균형 잡기 어려우면 그냥 네발로 걸었다.

 

그리고 이때쯤 나는 벨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 벨 이런 애 아닌데, 엄청난 캐붕과 굴림과.
진짜 우리 벨 이런 애 아닌데...
내가 미안해. 난 캐붕아티스트야
아티스트도 아냐 걍 캐붕메이커야

 

과팅하고 학교로 쳐 돌아오는 미친놈이 어딨다고. 지금 간다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풀떼기 붙이고, 흙 뒤집어쓰고 건물 입성한다. 눈물도 찔끔찔끔 달았다.

 

 

그리고 샤샤는 미친놈이었다.

 

 

 

 

 

 

 

 

 

 

 

 

 

 

 


과팅은 그닥 안 좋게 끝난다. 거진 다 그렇다.

 

샤샤는 뭐랄까, 음. 웬만하면 오는 사람을 내치진 않으나, 선 넘으면 내치다 못해 내팽개쳤다.

 

"난 테르시아가 좋은데."

"난 감자튀김이 좋은 것 같아. 하나 더 시키자."

 

"우리 같이 나가지 않을래?"
"싫은데. 밖에 추워."

 

"아니, 너무 그러지 말고. 텔시도 다 짝 만나려고 나온 거잖아."
"……."
"텔시?"
"응? 나야, 그거?"

 

뭐, 티키타카가 돼야 진행이 되지. 같이 나온 애들은 입 떡 벌리고 쳐다본다. 아니, 야(혹은 선배) 미쳤어(요)?

 

오늘따라 유독 더 반응이 구리긴 했다. 원래라면 앉아서 폰게임 좀 하다가 30분도 안돼서 '어, 나 아이스크림 먹을래.'하고 혼자 귀가하는 놈이 오늘은 끝까지 남아서 분위기 망친다.

 

적당히 초반 서포트 카드로 써먹었던 놈이 이러니까 주최자만 죽어났다. 저기 성격 더러운 복학생 선배 벌써 표정 꾸깃꾸깃해진 거 봐봐. 테르시아 덕에 내가 요절해보네, 하하.

 

샤샤는 그냥 좀 앉아있었다. 원래라면 할 거 찾아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그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쪽도 태연한 건 아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나?


샤샤는 딱히 궁금해하지 않는다. 살면서 궁금해해 본 사람 딱 다섯 있는데 그중에 둘이 가비, 스노우였고 하나가 벨이었다.

 

가비에겐 딸기 라떼가 왜 맛있는 건지 물었고(가비는 그건 설명하기 귀찮고, 예쁜 애면 다 딸기라떼 좋아한다고 했다), 스노우에겐 백설 공주(『The Snow White』) 원서로 읽어봤냐고 물었다(스노우는 그건 왜 궁금하냐는 듯이 쳐다보다가 그렇다고 대답해줬다).

 

벨한테는 아직 못 물어봤다. 앞으로도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정말 궁금하다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그냥 관심이 가던 거였으니까.

 

 

처음부터 그쪽 호기심이었다. 그냥 호기심 말고, 그쪽. 말로 풀자면 좀 어… 사랑 같은 거?

 

샤샤는 재수 없게도 본인이 끌어모으는 시선을 알았다. 눈에는 뜻이 담긴다.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살짝 담가 맑게 비췄다. 그래서 알았다. 그냥저냥 한 호감의 빛은.

 

벨을 처음 마주쳤을 때, 샤샤는 아주 잠시 생각해야만 했지. 혹시 우린 아는 사이인데, 내가 까맣게 잊은 게 아닐까.

 

마음에 몇 번을 담가야 그 깊이가 될까. 너의 깊이는 어디서 나타났길래.

 

 

단체로 똥 씹은 표정의 무리 사이에 그나마 아직 미소를 잃지 않은 사람이 똑똑, 테이블을 두드린다. 샤샤는 멍때리기를 잠시 그만두고 눈을 굴렸다.

 

"샤샤 맞지? 친구들끼리 부르는 거 들었어."

 

 

결국엔 이렇지.

개나 소나 다 아는 내 이름. 걔만 몰라.

 

 

테르시아는, 아니 샤샤는 결국 조금 더 조급하게 군다.

 

"나 아이스크림 먹을래."

 

끼기긱.

 

뒤로 밀린 의자에서 겉옷을 챙겼다. 당황한 상대가 벌떡 일어섰다.

 

"어? 가, 같이 갈까?"

 

 

샤샤는 주최자한테 카드 하나 던져줬다. 얼떨결에 받아낸 주최자가 눈 동그랗게 뜬다.

 

"너네끼리 놀아. 쟤 꼭 껴서. 밥 맛있게 먹어."

 

생긋생긋.

 

웃기는 아주 애들처럼 웃지.

 

"아, 나 그리고 너한테는 샤샤 아냐."

 

 

샤샤는 걸었다. 아이스크림은 무슨. 꽃병 깨고, 너 때문이라고 그래야겠다. 그러면 한 번은 더 만나겠지.

 

억울해? 나도 억울해. 나도,

 

 

아직까지도 서로 부를 이름 하나 모르는 둘은 그렇게 미친놈들처럼 예체대 언덕을 올랐다. 개같이 올랐다. 쿨한 애들을 잘도 이렇게 까지 찌질하게 만들어놓고.

 

사랑은 도대체 뭐 하는 수작이야?

 

 

 

 

 

 

 

 

 

 

 

 

 

 

 

 

그래서 다시 지금.

 

벨은 개취했고, 샤샤는 개찌질하고.

 

취한 와중에도 엘리베이터는 잘만 잡아서 6층까지 타고 올라온 벨이랑, 그냥 평소처럼 계단 타고 올라온 샤샤랑.

지가 만든 꽃병 들고 수상한 자세로 뒤 돌아본 샤샤랑, 그런 샤샤보고 눈을 의심하는 벨이랑.

 

 

"왜 여깄어요?"

 

그나마 멀쩡한 샤샤는 굳이 묻지 않았다. 제가 할 말임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물어봤자 대답할 정신상태가 아닐 것 같으니까.

 

다만 조심스럽게 다시 꽃병 내려놨다. 은근 제정신 들었다.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충동적으로 움직여본 적 없는데.

 

 

"…나쁜 놈."

 

벨은 아직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저 앉는다. 무릎을 팔로 감싸고, 얼굴 묻었다. 짜증 났다. 슬펐다. 억울했다. 근데 화는 안 났다. 막상 보니까, 그냥 그랬다.

 

엘리베이터는 눈치 못 보는 무생물이기 때문에 알아서 문 닫는다. '문이 닫힙니다'하고 얄짤없이 닫힌다.

 

벨은 힘이 쭉 빠져, 그냥 그대로 있었다. 실감 났다.

밀어낸 건 이쪽이었으니까.

 

 

샤샤는 엘리베이터 불 마저 잃고 깜깜해진 복도에서 눈을 깜빡였다. 손가락으로 눈썹뼈를 쓸다가 걷는다.

 

21세기 현대 산물답게, 간편하게 버튼 하나 누른다.

빛으로 가득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동도 없이 몸을 만 벨한테 그런다.

 

"집에 가자."

 

 

친구도 아닌 주제에.

 

 

 

 

 

 

 

 

 

 

 

 

 

 

 

벨은 다리 달랑거릴 거, 다 달랑거리고. 술 입김 불 거, 다 불고. 짜증낼 거, 다 내고. 시원한 목덜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서늘한 체온과 알코올로 올라간 체온이 만나 미적지근해질 때까지.

 

택시는 벨이 극구 싫다 했다. 안 그래도 술 때문에 울렁거리는데, 지금 자길 업은 이 남자 때문에 더 울렁거렸다. 차 타면 토할 것 같았다. 또 토 하기는 싫었다.

 

샤샤는 굳이 취객 설득 안 하고, 그냥 업어들었다. 취한 와중에 집 주소는 잘만 읊었다. 가비가 알면 뒷목잡고 훈계할 일이었다. 근데 가비도 그걸 알아야 해. 벨은 원래 안 그래. 진짜로. 정말로.

 

벨은 끝끝내 훌쩍인다.

 

 

샤샤는 처음부터 벨이 반지 끼고 있는 거 알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착한 성정은 못 되는 터라, 본인 기준 최소한의 윤리 관념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신경 안 썼다.

 

하지만 벨이 신경 쓴다면 그건 벨이 결정할 문제지.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한다. 결국엔 그랬다.

 

 

"왜, 이름 안 알려주는 건데에…."

 

뭉개지는 발음에 프슷 웃다가도 대답한다.

 

"나도 억울해. 너도 안 알려주잖아, 네 이름."

 

 

벨은 괜히 숨을 뱉는다. 엄밀히 따지면, 그래도 벨은 애칭이라도 아니까. 훨씬 유리한 쪽인데도 불구하고 아프다. 그러면서도 버겁다.

 

무너진 다리에 깔려, 그 모든 하중에 내리눌리는 것 같다. 더 이상 다리가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

 

그걸 깨달아서 아팠다.

 

 

"난 당신을 뭐라고 부를 수 있어?"

 

요 근래,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

 

 

 

 

 

 

 

 

 

 

 

 

 

 

 

 

…………와,

 

차라리 숙취 왔으면 좋겠어.

 

 

벨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차라리 샹들리에 달리고, 중세풍 드레스에, 시녀가 문 두드리는 낯선 천장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림도 없이 제집이다.

 

그 와중에 귀갓길까지 완벽히 기억났다.

 

가비, 보고 있어? 네가 중간중간에 챙겨준 숙취해소제 정말 짱이다. 숙취가 하나도 없어. 하하, 멀쩡하니까 진심으로 어제의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뭐야.

 

 

하하하, 하하, 하….

 

벨은 두 손으로 눈을 덮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손가락 사이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테르시아.'
'샤샤는 안 돼요?'

'우리가 무슨 사인데?'

 

그걸 알면. 내가 왜.

 

 

 

벨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싱겁게 탁자 위에 올려진 최신형 갤럭시 메가 XR, 뭐 대충 그런 이름의 폰을 들었다. 화면을 켜면 상단에 번쩍, 카톡이 뜬다.

 

가비 : [잘 일어났어??? 해장가쟈😚😚]

 

벨은 왠지 부은 것 같은 눈가를 꾹꾹 누르고 일어섰다. 그래, 일단 잊자. 일단은. 일단.

 

 

 

 

 

 

 

 

 

 

 

 

 

근데, 그렇게 항상 원하는 대로 되겠냐고요.

 

 

시애틀도 아니면서, '시애틀 피자'를 간판으로 단 가게 안에는 총 셋이 이미 앉아있었다.

식사하지 않는 스노우. 벨을 보고 손을 봥봥 흔드는 가비. 든든하게 피자 처먹는 테르시아.

 

"벨, 여기!"

 

가비가 소리 내 부르자, 샤샤는 그제야 우물우물 거리며 올려다봤다. 눈이 겁나게 맑다.

 

 

그렇게 잠시간 정적.

 

"여긴 샤샤! 저번에 봤었지? 볼 일은 잘 해결했어?"

 

"어?"

 

땡글 땡글 한 눈에 벨은 멈칫거린다.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말을 할 수가, 있나?

 

손끝이 굳는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데도. 반지가 죄어온다. 벨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자, 가비가 '응?'하며 벨의 시선을 쫓았다.

 

테르시아는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 돌리고 포크로 피클 하나 찍었다.

 

"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대답이었다.

벨은 끝내 헛되게 웃는다.

 

 

뭐야.

왜 니가 상처받아. 계속 니가 밀어냈으면서. 넌 왜 아파.

 

 

어제 끝끝내 제 이름 하나 뱉지 못했으면서, 빤히 그 뒤통수만 내려다 봤다.

가비가 어떤 눈으로 저를 보든, 스노우가 어떤 생각으로 샤샤를 보든.

 

 

"테르시아."

 

테르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벨은 숨을 들이쉰다. 스노우는 물컵을 만지작대며 시선을 돌린다. 가비는 눈만 굴리다 벌떡 일어나 가게 출입문 앞으로 뛰었다.

 

그런 가비를 비웃든 문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종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 어디 가시게요?"

 

벨은 결국 주저앉았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가비만 끄응, 하고 입 닫는다.

 

 

"그, 말씀하신 숙취해소제 사 왔는데…."

 

션은 이 얼어붙은 분위기에 머뭇거렸다.

 

샤샤는 몸을 일으켰다. 어제처럼 바짝 몸을 만 벨을 보다 스푼, 포크를 꺼내 상 위에 올려줬다.

 

"난 먼저 간다."

 

스노우는 뭐라 답도 못하고 그냥 숨만 내쉬었다.

 

 

션이 끝내, 종소리를 딸랑이며 나간 샤샤를 돌아보고 있으면. 가게주인 할 것 없이 정적에 휩싸인 공간에서 벨이 말한다.

 

"미안해요. 나 션을 사랑하지 않아요."

 

벨은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똑똑히 마음을 뱉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요."

 

 

끔뻑끔뻑.

 

"그건…."

 

션은 못내 당황한 듯 말을 절었다.

 

"그건 우리한테 문제 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해. 문제 될 게 없나?

너 정말 문제 없어?

넌 사랑과 의무 모두 책임질 자신 없잖아.

 

그러면서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랑 때문에 다 버릴 수도 없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흔하디 흔한 피자집에서 궁상떨 거 다 떨었다. 션은 끝내 우물쭈물하다가 가비에게 밀려 가게를 나간다. 돌아온 가비는 그런 벨을 보며 쌩 올라간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벨…."

 

스노우는 그런 가비를 보면서 고요히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손을 잡는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없습니다. 적은 쪽을 택하세요."

 

벨은 이 와중에도 눈물 하나 내지 않았다. 바짝 마른 눈동자가 뻑뻑해서인지, 머리가 아팠다.

 

가비는 스노우의 손을 한 번 꽈악, 맞잡고 벨의 손을 잡아챈다. 하얗게 질린, 찬 손.

 

 

"벨, 한 번도 바라본 적 없지? 그러니까 이제라도 해야 해."

 

벨을 아끼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목소리는 더 단단해진다.

 

"네 삶이잖아."

 

 

 

벨은 운동화 끈 풀린 채로 발을 구른다. 타닥이는 소리를 태며, 내리막길을 내리달린다.

쓸데없이, 아니 지금만큼은 쓸모 있게, 분홍색은 사방팔방에서 눈에 띄었다.

 

 

"야!"

 

억울해서 혼자만 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망할 거면 너도, 나도.

 

 

"가지 마, 테르시아!

 

 

 

 

 

 

 

 

 

 

 

 

 

 

 

 

 

 

 

 

 

 

 

 

 

 

 

 

"저 결혼 하고 싶지 않아요."

 

벨은 무슨 환불하러 온 사람마냥 주먹을 꽉 쥐었다. 마주하는 사람을 곧게 응시. 부드럽게 선 자세가 장군이 따로 없다.

장군답게, 차분히 손을 내밀어 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 왜 헤어지자는 말을 코스 당 30만원 하는 유명 레스토랑에서 하니?

 

 

벨은 그깟 몇 백만원 쯤은 아깝지 않았다. 1억이 넘는 반지도 전혀 아깝지가 않은 걸 보면, 결국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랑이 언제나 이 자리에 그대로 남을 지폐를 이기기도 하는 듯?

 

사랑이 그랬다. 무모하고, 어리석고. 또, 어쩔 수 없고.

 

 

션은 눈만 크게 키운 채로 반지를 한 번, 벨을 한 번 돌아본다. 끔뻑끔뻑. 당황이 얼굴에 다 비쳤다.

 

"어…. 허락, 안 해주실 것 같은데도요?"

"네."

 

 

벨은 더 당황할 것도 없었다. 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바꿀 생각이 없다. 비난해도 할 말 없고, 번복할 맘도 없다. 지금도 샤샤가 보고 싶었다. 항상 기다리게 됐다.

 

션은 그런 벨을 쳐다봤다.

 

 

벨은 알까. 지금 본인이 얼마나 빛을 내고 있는 지. 을 가득 담아 꼿꼿히 허리를 세우고 하늘에 맞서는. 바짝 치켜뜬 눈꺼풀을, 일렁이는 홍채를 따라 펄럭이며. 두근.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길이가 있지.

 

머뭇대던 손이 결국 약지에 닿는다. 션은 뭐가 웃긴 진 몰라도 그냥 웃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쉽게 빠진 반지가 테이블 위에 닿는다.

 

 

"그래요. 우리 헤어져요."

 

 

 

 

 

 

청춘의 꽃, 20세.
사랑하기에, 청춘은 불효의 이름으로 개쳐망한다.

 

 

 

 

 

 

 

 

 

 

 

 

 

 

 

 

 

 

 

 

 

"야!"

 

샤샤는 순순히 몸을 돌린다. 이 서투른 아이는 그새 억울함을 담은 숨을 고른다.

 

기꺼이 못된 아이가 되어줄 수 있었다. 탓해도 좋아.

 

"가지 마, 테르시아!!"

그래서, 언제든 돌아보겠다는 거야.

 

너의 망설임이 어색하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샤샤는 손을 살짝 잡아내고 물었다.

 

"후회는 버리고 왔고?"

 

 

벨은 깊은 열망을 담은 눈으로 꽈악, 손을 맞잡는다. 숨을 고른다. 결국엔 실토할 것이면서.

 

"테르시아가 내 후회 같아요."

 

맑게 웃은 샤샤가 속삭였다.

"샤샤야, 벨."

 

반지라는 게 다 그렇듯이, 5년짜리가 그렇게도 쉽게 빠지더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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