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형태는 무엇인가
김모씨는 정당한 이세계 난민으로서, 사랑받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
손에 든 사랑학개론 연구 보고서가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떡 벌린 지금은 그 생각이 바뀌었지만.
하늘에서 내리쬐는 더위를 가뭄에 비 오듯 삭히는 옅은 바람이, 여느 2차원의 '사랑의 개연성'이란 이름의 나뭇잎으로 변태하여, 내리감은 눈 위로 직격타를 날린다.
말없이 내려보던 그는 그제야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사랑의 개연성'을 떼어냈다.
얼굴만으로 서사를 충당하는 인물이 살풋 웃어 보이면, 그건 더 이상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그건….
김모씨의 개쓰레기요일 1교시에 관한
'사랑학개론' 차원적 연구
: 사랑의 형태란 무엇인가
김모씨는 차원이동자다.
일단 이 명제가 김모씨의 일생에서 가장 Spectacle 하고, Personal 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장 첫 줄에 적히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이다.
김모씨만 하더라도 이 명제에 얽힌 또 다른 명제들이 False 값을 내놓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가장 첫 줄에 써주었을 것이다.
그래, 날 뒤통수치지만 않았어도.
차원이동자란 무엇인가?
적어도 김모씨가 봐왔던 차원이동자는 한결같았다.
차원이동자는 '그냥 목숨만 건지자'라는 목적의식과 달리 어떡해서든 동부 마탑주와 운명의 바람에 휘말리고,
마른하늘에 먹구름을 만들어 피치 못할 외박으로 북부대공과 하룻밤 만에 눈이 맞으며,
사직서라 부르고 연애 통보서라 쓰는 편지를 남부 황태자에게 날리면서,
날카로운 시기와 질투를 코웃음으로 대갚음해 주고, 그 위기를 서부 상단주와의 만남으로 다룰 줄 안다.
그냥 그런 '주인공'.
그래서 꼭두새벽부터 지붕을 뚫고 하늘 위에서 추락한 웬 김모씨를 자작가가 받아준 것 아닐까?
그게 주인공의 개연성이잖아?
한국에선 느끼지도 못했던 파동이 몸 안에서 진동을 울리고, 그걸 또 제법 잘 해내는 김모씨 본인이 어찌 주인공이 아닐 수 있냔 말이야?
그래서 제국의 스카이, 칼미아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 아니냐고, 정말.
차원이동자이기에 김모씨는 의연했다.
외모, 재력, 인성을 갖춘 이성과의 사랑.
굉장히 심장을 뛰게 하는 부분이었으나, 어차피 찾아올 것을 직접 쟁취해 내겠다는 열망은 없었다.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통한 권력욕의 실현이 목표였지.
누가 봐도 곧 마탑주의 자리를 차지할 아실리와의 학생회 마주침 이벤트도, 제국 최고 미인이라 불리는 로드리온과의 도서관 마주침 이벤트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얼굴은 당연하지 않았고, 아직 김모씨에게 관심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조급해할 것도 욕심낼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후, 하-. 진정해, 김모씨의 심장 혈관계.
그 시기도 그랬다.
말했던 것처럼 김모씨는 권력욕을 소지 중이고, 한국의 입시생 출신답게 카페인에 몸을 절여 시험기간을 구르는 재능을 타고났다. 전교 1등 같은 자리는 당연히 태생부터 잘난 남자 주인공들의 차지지만, 어차피 내 남자. 중요치 않다.
그래서 월요일 첫 수업(1)인 사랑학개론의 조가 정해졌을 때는 암담했다.
로드리온과 같은 조가 되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건 나머지 한 사람.
(1)김모씨에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개쓰레기요일 1교시 수업인
'유리아 솔트 캬라멜.'
그 이름이었으니까.
유리아가 누구인가?
신입생들 군기 잡기가 한창이던 1학년 시절, 마법 지도를 맡은 고릴라(2)의 꼰대력을 깨부수고도 만점을 받아낸 마법 천재이자, 칼미아 297기 중 유일한 평민.
이런 자잘하지만은 않은 평가보다도 먼저 봐야 할 것은 하나다.
(2)마법술기학 교수 : 덴저린
297기의 최고 트러블메이커.
김모씨의 성적이 유리아의 기분파적 행동으로 인한 도출 값이 되었을 때, 김모씨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로드리온의 미모만큼 심리적 부정맥을 앓았다.
'제발 최소 기숙사실 폭파가 예정된 유리아의 트러블력이 이번 사랑학개론을 지나치게 해주세요.'
그리고 모든 트러블이 지나간 후, 김모씨를 찾아온 감상은 상상보다 섬세하고 현실적이었다.
이 세계가 품은 정말 중요한 꽃잎은 김모씨가 아니었던 거지
사랑의 형태란 무엇인가.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완전한 추상명사로서 그저 상상할 뿐이다.
심장이 어떻게 Heart처럼 생겼다는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일단 Heart는 대표적인 사랑의 표현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심장에서 시작하는가?
사랑은 심장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시작은 뇌에서, 여러 가지 호르몬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시 망상이 만들어낸 사랑의 표현 중 하나인 분홍색, 혹은 홍색을 띨 것만 같은 호르몬이 심장에 도달하면….
X 같은 자필 과제는 김모씨에게 영광의 굳은살을 하사하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보다 조용히 진행되는 사랑학개론 조별 과제 3회차 만남은 순조롭다. 화사한 금발이 책상 위를 차지한 채 자꾸만 보고서를 침범하는 건 펜으로 밀어내면 그만이다.
김모씨는 과제를 작성하면서도 힐끔, 유리아를 살폈다.
방금까지 사서 교수님이 기르는 고양이와 키득이며 시간을 보내더니, 그 온기에 잠든 듯했다. 품에 안긴 고양이도 순순하다.
일반적인 차원이동자의 일대기를 보면, 유리아는 언젠간 그녀의 조력자가 될 캐릭터였다. 남주 후보의 오랜 친구이자, 주도적인 근력캐. 어쩌면 권력을 잡을 김모씨에게 기사의 맹세를 해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기회가 또 굉장한 메리트였다.
한 90%의 확률로 그녀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김모씨는 휘말리고.
그렇게 친구가 되고.
그러다 보면 남주 후보와도.
일부러 그녀의 반대쪽 얼굴은 살피지 않았다. 사랑이라기엔 진지하지 못했지만, 그 얼굴은 좀 사기라서 철천지 원수 사이의 남성도 심장이 뛰고 말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김모씨는 굳이 먼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 싶지 않았다. 분명 심장에도 무리가 갈 외모이니 건강도 챙길 겸.
그래도 오후는 나른하다.
열어둔 창문 새로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고, 향마저 꽃내가 났다.
약간의 설렘을 가지기 충분한 시간이었고, 너도 나도 방심하는 시간이었고.
'사랑의 형태가 있다면, 그건 이해할 수 없는 궁둥짝의 상하 반전 모양이 아니라 꽃잎이라던가, 뭐 그런 게 아닐까'했다는 말이다.
혼자 애써 유리아에 관한 고찰 500장을 써내려던 중, 잠시 돌린 방심 시야에는 분홍색 눈동자가 맺힌다.
사랑의 형태는 무엇일까.
구겨진 나의 보고서.
꽃잎 대신 날아든 나뭇잎.
쌉싸름한 아메리카노.
은은한 꽃내음.
그의 옅은 미소와.
나의 불안한 눈빛과.
분홍색.
그제야 살짝 옆으로 치우친 로드리온의 그림자가 어딜 향하지는 지 알아차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한순간이라 하였는가.
하나 더 추가하자면,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도 한순간이더라.
"도대체 왜 그 둘이 100% 친구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김모씨의 설명 보급형 친구를 맡은 밀모씨는 헹굼 세탁 2번, 탈수 3번을 거치고 바짝 말라가고 있는 리얼리즘 말하는 인간 수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말고, 대답해. 왜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건데?"
말하는 인간 수건.
"X발."
"뭐래. 갑자기 약을 처먹고 왔나. 그 둘이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면 뭐, 졸라 특별한 친구 특기자 전형 입학생이냐."
"생각하고 말해라."
밀모씨는 테이블 위에 놓인 푸실리 파스타에 충분히 행복을 만끽하며 식사 중인데, 김모씨가 왜 갑자기 말하는 수건이 된 건지에 관해 궁금증을 가질리 없었다.
듣자 하니 학교 내 유명 인사 유리아와 로드리온과 함께 조별 과제를 하는 중인가 본데, 또 뭔 오해를 만들어 낸 건지. 대답해 주기도 귀찮다.
밀모씨가 보는 김모씨는 굉장히 특이한 이름처럼 사람 자체도 특이한 놈이었다. 해탈한 건지, 그냥 관심이 없는 건지, 항상 한 발자국 뒤에서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인간과 친하게 지내는 수건은 없다.
아, 반대로 말했다. 아무튼.
밀모씨도 마법사의 자질을 가져다 버린 체질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준 게 김모씨가 아니라면. 저런 김모씨와는 친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뭐, 아무튼 별종이란 뜻이었다. 제법 착하고 성격 좋은 별종.
밀모씨는 왠지 착잡해 보이는 김모씨는 버려두고 푸실리를 한 움큼 더 떴다.
"야. 짝사랑하나 봐."
"누구를?"
푸실리에 의해 관대해진 응대에 김모씨가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눈가를 덮는다.
"내가 아니라."
"누가?"
관심 없지만 한 번 더 대꾸했다.
"로드리온이."
푸웁-!
"유리아를."
켁,
296기의 피모씨는 재수강의 늪에 갇힌지 오래다.
저학년 시절 좀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는 하등 쓸모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쳐 놀았을 테니까.
아무튼 '사랑학개론'은 점수 짜기로 유명한 마법 약물학 교수의 수업으로 기억상 피모씨는 제법 선방한 과목이었다.
선방해서 재수강이다.
아무튼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사랑, 굉장히 낭만적이지 않은가. 아마 사랑의 형태가 있다면 검은 단발에, 빛이 비치면 약간 갈색빛을 띄는 검은 눈동자일 것이다. 저기 신성한 급식실에서 헹굼 세탁 2번, 탈수 3번을 거치고 바짝 말라가고 있는 수건 같은, 응?
"뭐야. 얘 왜 이래?"
빠르게 다가가 물으니, 사레들린 듯한 밀모씨가 거칠게 물 한 컵을 원샷하고 숨을 몰아쉬곤 대답한다.
"와, 선배. 얘 돌았나 봐요!"
"예. 보다시피 착잡하니 말 걸지 마세요."
매섭기도 하지.
피모씨는 어물쩡대며 눈만 꿈뻑였다.
항상 초연하던 얼굴이 초췌해진 게 보통 일은 아닌 듯싶었다.
"아니, 로드…! 크흠. 로드리온이 짝사랑 중이라잖아요. 참고로 '로드리온을'이 아니고 '로드리온이'요."
사납게 외치던 밀모씨가 몰리는 시선에 금세 쭈그러들어서 속삭인다. 그리고 피모씨는 본인의 귀를 훑었다.
"뭐라고?"
"그러니까 로드리온이 유리아를…."
"에, 유리아가 아니라?"
벌떡 치켜들려 진 머리통이 새까맣다.
"누가 누구를요?"
피모씨는 짝사랑 상대의 강렬한 눈빛에 헙, 입을 다물었다.
유리아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학생이다.
그 중 피모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축구공으로 대머리 예술학교수의 가발을 벗긴 것이었다.
제일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피모씨가 직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유리아는 칼미아의 최고 유명 인사였다.
아, 그래도 개구리를 가지고 학교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한 봄의 사건은….
"선배, 자꾸 다른 데로 새지 말라고요."
"으응, 미안."
아무튼 그날은 292기의 졸업식이자 299기의 입학식 날이었다.
외부인들이나 입학생, 졸업생에겐 굉장한 행사였겠지만 피모씨에겐 그냥 4학년 종업식일 뿐이다. 1도 설레지 않아서 축제 부스에서 솜사탕 하나 사 먹었다.
자고로 12월 31일의 불꽃놀이는 기숙사관의 테라스에서 구경하는 게 국룰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모씨의 기숙사실은 외측에 위치한 방이라서 불꽃놀이를 측면으로 구경해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끔 불건전한 이성 교제인들이 측면 외벽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피모씨는 망설임 없이 이때를 위해 준비해 놨던 튀김가루를 뿌려 대처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생강을 통째로 씹은 듯한 표정으로 최악의 불꽃놀이를 감상하던 도중, 피모씨는 괴한을 맞닥뜨렸다.
멀쩡한 5층 기숙사실 안에서 괴한을 마주칠 확률을 구하시오.
"선배, 중요한 것만 말하라고."
…유리아였다. 정확히는 로드리온을 업은 유리아.
그 시각 외측 테라스를 열어놓은 학생이 피모씨 하나뿐이었다고 했나. 이것들 분명, 이곳의 전망에 질려 다른 친구의 방으로 놀러 간 게 틀림없었다.
로드리온은 생긴 대로 몸이 약했다. 그 사실은 굳이 누가 말해주거나 본인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리아는 말도 없이 쳐들어와서 새하얗게 질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는 로드리온을 피모씨의 침대 위에 눕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기도 했고, 그 유리아의 표정이 너무도 낯설어 피모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데 그들에겐 왜 그리 위험한 일이 많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로드리온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평소에도 그렇긴 했으나 그땐 분명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피모씨가 본 유리아의 눈동자는 답지않게 어두웠다. 힘이 빠진 손을 꽉 맞잡고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유리아는….
감상에 젖은 피모씨가 그 상태로 침묵을 지켰다.
"…뭐야, 그게 끝이야? 유리아는 길거리 돌아다니던 고릴라교수가 쓰러져도 구해줄걸요?"
황당하다는 밀모씨의 말에 김모씨도 동의하는 입장이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사실 김모씨가 사랑을 느낀 것도 한순간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피모씨 정도면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뭐 다른 점은 없었어요?"
"아, 얼마 안 가서 아실리랑 루시아한테 내쫓겨서 그 뒤는 잘 몰라."
헤헷.
없나?
리온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 적부터 혼자였다.
외로움을 갉아먹고 자란 안정은 끝내 도전하지 못한다. 사람을 들이기엔 버텨온 세월이 아쉬웠다.
이 안정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형태는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틀리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을 믿고 불안정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내게 너는 혼란이고, 소란이다.
나의 일생을 차지했던 달이 너를 끌어당길 때면 지구가 반대로 기우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행성이 다시 너를 돌려줄 때까지, 나의 밤은 수천 번 휘청였음을.
사랑의 형태는 어쩌면 형용할 수 없는 불안정일지도.
김모씨는 공허한 마음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거짓말처럼 조별 과제는 큰일 없이 막을 내렸다.
아마 앞으로도 김모씨가 둘과 엮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저 둘의 사이를 정의 내리는 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모씨는 한참 동안 유리아와 로드리온의 보고서를 내려보다가 본인의 보고서를 꺼냈다.
그리곤 마지막 문장을 이어 적었다.
사랑의 형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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