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Cute Blue Gray Pointer Russell's teapot
사 월 찬가

 
 
혹은 천 일 예찬
 
 
 


영웅에게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어.
영웅이 끝내 인간을 초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그 경계선에 선 아이지만
그래도 너는 행복해야만 해.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사 월,
 
나의 시간을 곱게 엮어 늘어뜨리다 보면,
그러면 언젠간 네게 닿겠지.
 
그 또한 우리에겐 4월이겠지.

 
 
 
 


사 월 찬가

혹은 천 일 예찬


 

 
 
 
 
서류를 적어 내려갈 시기는 지났다.
그저 읽고, 생각하고, 서명한다.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용지 위, 닿는 펜촉은 아주 잠시간 곡선을 그려내곤 떨어진다.
앞에 놓은 서류는 금세 옆으로 치워지고, 어떠한 결론이 나기 전까진 다시 나타날 일도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에는 미숙했다.

 
책을 읽었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글 자체는 지루하다. 그 속 담긴 이야기가 흥미롭다면 쉽게 읽히지만, 관심 없는 분야는 쉽사리 읽히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소설보다 학문 서적이 쉬웠다. 오늘 먹은 아침 따위의 이야기로 한 장을 꼬박 채우는 감정 묘사는 어려웠다.
 
그래서 한 줄을 적고는 손을 멈추는 것이다.

 
편지를 써 본 게, 얼마나 된 거지.

 
 
아주 어릴 적에는 하나 남은 가족에게 불안을 꾹꾹 눌러 담은 적이 있었다. 그건 편지라기 보단 호소문이었다. 우울이었고, 갈증이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대형 길드에 몸을 담은 지도, 벌써 꽤나 긴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유서'는 처음이었으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임무에 차출되는 길드원은 유서를 적는다. 필수적인 일은 아니었으나, 제법 추천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은 어떤 위험에도 살아남기엔 너무도 연약한 생명체고, 대개 임무는 모든 위험과 맞닿아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감히 예상해보자면, 너는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바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또는 너의.

너는 항상 앞이 보이지 않는 듯 걸어 나갔다.

 
 
네가 의뢰 도중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은 어쩌면 너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동시에, 나만은 해야 하는 모욕임을.
 
모순적이게도 나는 네가 완전한 영웅이 될 수 없도록 붙잡고자 하는 방해물이자, 지상에 발을 붙이도록 매어둔 닻이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가장 주도적인 회피일까.
아니면 가장 수동적인 구속일까.
 
나는 네가 돌아올 것이라 누구보다 당연히 믿으면서도 기다릴 수 없었다.
아직 네게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건네지 못했으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말 없이 응시하다가, 피식 웃어 보인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편지지를 내민다.
받아든 편지지는 분명, 길드 내에 보관되는 유서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당연해서.
 
 
거친 표면은 잉크를 보다 울퉁불퉁하게 빨아들이지.
꼭 얼룩 마냥.

 
 
나는 부러 네게 내 불안을 묻힌다.
날개에 매달려 추락한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인간이었으면 했던 너를 위한.

 
 
 
 
 
 
 
 
이건 어린 시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네게 보내는 기쁨이자 소망.

  결국엔 끝까지 유서는 되지 못할 편지.

      꽃 피는 봄에 사라진 네가, 돌아오기까지 나를 달래는 너의 사 월.

 
 
 
 

그리고, 나의 사 월.
 

 
 
 
 
 
 
 
 
 
 
 
 
 
 
 
 
 
 
 
 
 
 
 
 
눈을 뜨면 왠지, 새하얀 설원이다.
 
 
의미없이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억은 쓸데없이 생생했다. 마땅한 이유 없는 실종이 잦은 산길. 호위를 의뢰했던 어린 소년과, 그 아이가 이끈 동굴 안. 꼭 찾아야 하는 것이 있다며 손을 잡아 왔을 때엔, 생각보다 찬 온도에 꽉 맞잡았던 것 같다.

 
 
'편지가 왔어.'
 
문득 깨닫는다.
 
'답장을 해 줘.'
 
기억이 그곳에서 끊겨있다는 것을.

 
옆에 놓여진 검에 시선이 닿는다.
왜 호위를 하고 있었던 건지. 그런 직업이었는지. 그렇다면 왜 여기에 누워있는 건지. 여기는 어디야?

 
 
답 없는 질문 앞으로 뽀독이며 내리눌린 발자국이 하나.
 
 
"뤼샤비크의 4월은 겨울이야."
 
있잖아,
왠지 이 순간이 낯설지 않아.
 
"6월도, 7월도, 8월도 모두 겨울이지."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고는 빨개진 코끝으로 웅얼이는 모습이 아주 작았다. 그 작은 몸이, 꼼지락 거리면서 품에서 손을 꺼내곤 내민다.
 
"죽고 싶지 않다면 일어나."
 
소녀는 가만히 두 눈에 아이를 담다가
씨익 웃으며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곤,
감탄했다.
 
"내 손 좀 봐. 완전 작아졌다!"
 
눈썹을 찡그리는 얼굴이 생긴 것 답지 않게 어울렸다.
 
 
 


      U

      나는 그냥, 이상하게 너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아.               
      본 적 없는 무채색 안에서 저마다 작고 힘겹게 싹을 틔우는 게,            
      상상하지도 못 할 정도로 펑펑 내리는 눈과 함께,                               
      너와 보낸 적 없는 겨울을 함께 나고,                                               
      시린 발을 녹이고, 새빨개진 손으로 너를 쥐고 속삭이면서.                 

R         



     R

                 착각으로 무시할 수도 없게,     
                     네 색만 선명한 거 알아?      

   


 
 
 


 
 
 
 

유리아는 편지를 고이 접는다. 익숙하게 촛농을 녹이고, 그 위로 작은 인장을 찍는다.
 
자주 편지를 쓴다. 필요한 자에게, 주고 싶은 사람에게, 잊혀진 아이에게, 기다리는 너에게.
 
그 안에 담긴 글자의 무게는 상관하지 않은 채, 편지는 길을 떠난다.
 
때로는 유리아보다 늦게, 때로는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하면서.
 
답장은 유리아의 집으로 돌아온다.

 
 
너의 것은 돌아오지 않아.
 
항상 그 곳에는 네가 있으니까.
 
그래서 편지를 썼다.
 
항상 네가 그 곳에 있을 테니까.

 
 
 
 
 
 
 
 
 
 
 
 
 
 
 
 
 
 
 
 
 
 

-
April is the cruelest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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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여기서 머물러. 3일 후면 수도로 가는 게이트가 열릴 거야, 어느 쪽이더라도 여기보단 수도에서 돌아가는 길이 빨라."
 
태생부터 높은 체온은 설원의 사나운 입김에도 얼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고 눈밭을 맨발로 걸은 일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건 아니다. 아이는 붉게 튼 소녀의 발을 힐끗 보고도 눈길을 돌린다.

 
 
끝까지 모른 척 하면서도, 못 본 척은 못하는 아이.

 
 
소녀는 부러 밝게 웃으며 방 안으로 물기 어린 발자국을 남겼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어!"

 
투명한 분홍빛 눈동자가 흥미 없다는 듯이 벽난로를 한 번 확인한다.
벽난로에선 마력의 냄새가 났다. 나무 탄 내. 저 아이의 것은 아니야.

 
 
문득 소녀는 누군가 자신을 두고 햇빛 냄새라 표현했던 것을 떠올린다. 정말 문득.

 
기다림 없이 문고리를 잡는 새하얀 손목을 잡아채 본다.

 
 
"너한테선 풀 냄새가 나."

 
그건 아주 이른 답장이었는지,
조금은 늦은 답장이었는지. 
 
 


      R

      난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봤어.                       
      하루하루, 조금씩 별의 위치가 달라지는 걸 알아?                     

      지금은, 너를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봐.                          
      너 또한, 매일매일, 돌아오고 있을 테니까.                               

U         



     U

                        넌 나를 부른 거야.     
                          내가 필요하니까?     

R     


 
 
 


 
 
 
 
리온은 책상 한 켠, 서랍 안에서 나이프를 꺼낸다.
천천히 편지 봉투를 자르고, 그 안 새 하얀 편지지를 꺼내 글자를 읽는다.

 
한참을 읽고, 또 읽다가 다시 고이 접고 나면.
 
답장은 보낼 수 없지.
 
너는 더이상 그 곳에 있지 않을 테니까.

 
 
대신 언제나 이곳에.
네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

April fool's day.

-

 
 
대리석 바닥을 둔탁하게 치고 달려 나간다.

 
고요했던 저택은 소녀가 머문 뒤로 갖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책장에 기대어 책을 읽던 아이는 익숙지 않은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어 올린다.

 
발돋움 소리는 저 멀리로 사라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리온!"

 
벌컥 열린 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면.                                                                                                                 
 
 
정말 멋대로 부르고, 박차고 들어와선, 억지로, 아이를.

 
소녀는 다시금 아이의 손을 붙잡고 복도를 내달린다.
아이는 당황한 낯으로 손을 비틀어 빼내 보지만, 부드러운 손아귀가 금세 따라잡았다.


 
예상했던 3일보다도 긴 시간이 아이에게 소녀를 묶는다.

 
 
"마을에서 작은 축제가 열린대!"

 
"난, 안 가…!"

 
"같이 가자!"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내치지는 못 하지.

 
아이는 물러. 아직 어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아이의 내일을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맨발로 설원 위를 달려 나가기도 잠시,
평소보단 거센 힘이 급하게 소녀를 잡아당긴다.

 
"맨 발로 다니지 마."

 
 
이상하게, 아이의 다정함을 알고 있던 것 같기에.

 
"응!"

 
사실 네가 두려워함을 알고 있어.

 
 


      R

      악몽에 하루가 무너지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U         



     U

                        너를 끌어안고, 함께 잠기더라도.     
R     


 
 
 
 


 
 
 
 
내내 이질적으로 굴었던 세상에 녹아들기를.
 
네가 마음껏,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

All fools' day.

-

 
 
"너는 정말 돌아갈 곳이 없어?"

 
"이제야 좀 애 같다."

 
푸딩을 한입에 넣고는 하는 소리가, 자기는 성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장난스럽다.

 
아이는 소녀가 뒤집어씌운 털모자가 자꾸만 내려오는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치켜올렸다.

 
"남는 방도 많고, 가주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니까. 길을 잃은 자가 일주일 정도 머무는 건 흔해. 그런데 그 이상은."

 
아이는 사람이 싫었다.

 
"리온, 내가 여기 사람 아닌 건 어떻게 알아?"

 
이별이 싫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기다림이 싫었다.

 
"나 여기 사람이랑 다르게 생겼어?"

 
그래서 항상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넌 햇빛 냄새가 나니까."

 
태양이 사라지지 않도록,
태양이 닿지 않는 곳으로.

 
 
 
소녀는 씨익 웃으며 답한다.

 
"나 있어, 돌아갈 곳."

 
내리던 눈이 솟구친다.

 
 
 
 
소녀는 또다시 아이를 떠나겠지.
 
 


      U

      널 사랑해.                                                                       

R        



     R

                                                          너 없이는 추워.     
U     


 
 
 


 
 
 
 
그럼에도,
 
네가 두렵지 않도록.
 
너를 가장 먼저 찾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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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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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심은 묘목에 물을 준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온실을 놔두고, 굳이 밖을 선택한 아이는 차게 얼은 손으로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면, 이질적인 빛들이 쏟아져 내릴 듯 하늘을 고정했다.
 
소녀는 품에 검을 차고, 아이가 준 신을 신고, 머리를 질끈 묶고.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치켜들어본다.

 
"내 이름이 뭔지 기억 났어."
 
흐릿하고 짧은 밤.
 
"그래."
 
이건 이별. 덧없이 단조로운 끝.

 
 
허나, 첫인사.
 
네 손을 붙잡는다.
 
"우울할 때 너는, 천장이 없는 곳으로 나와서 하늘을 봐."
 
너는 내게 답장을 보낼 수 없음에도.
 
"그러니까 너는."
 
너를 기다릴 수 없는 나는 답장을 보낼 테니까.
 
"내게 편지를 보낸 거야."
 
샛노란 소녀의 체온은 설원에서도 분명히 높기 때문에 착각일 리가 없지.
 
"매일 나를 부른 거야."
 
"...그런 적 없,"
 
"다시 돌아올게."

 
 
 
"우리 다시 만나면, 내가 너무 늦으면."

 
 
있잖아.
나는 왠지, 이 순간이 낯설지가 않아.

 
"그때는 제대로 사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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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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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뜬다.
 
서리가 얽힌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곤 몸을 일으킨다. 곁에 놓인 검을 들고, 푸릇푸릇 풀이 오른 흙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며.

 
동굴 입구에 다다르면, 하늘에서 떨어진 눈송이가 와르르.

 
 
편지가 왔으니.
 
나는 기다릴 수밖에.

 
 
 
 
 
 
 
 
 
이건 지금의 내가, 지금의 네게 보내는 소식이자 답장.
 
  결국엔 끝까지 나를 붙잡는 구속.
 
      꽃 피는 봄에 사라진 내가, 돌아오기까지 너를 달래는 나의 사 월.
 
 
 

그리고, 너의 사 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알아."

 
아이는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네준 서류에 마지막으로 서명을 마치고 일어선다.
 
생각해보면 의외로 고집이 센 성격이니,

그는 그저 낮게 웃고는 타 놓았던 찻잔을 제 앞으로 옮기는 것이다.

 
"정말 먼저 갈 생각이구나. 내일이면 루가 돌아오는데도."


 
아마, 우린 조금 다르지.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나는 그래야 해."

 
소녀는 가끔 자신의 외로움조차 까먹는다.
그래서 아이는 배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하지.


 
"그래."
 
그는 커피 대신 쌉싸름한 차를 입에 담았다.
 
 
"다녀와."
 
 
 
 
 
 
 
 
 

P.S.
너무 늦으면, 사과할 테니까.
 
 
그건 아주 이른 답장이었는지,
조금은 늦은 답장이었는지. 
 
아직도 사과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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